라이프 오브 파이, 2013 by 미스터칠리


새해 첫 포스팅이로군요.

타이틀 오른편의 연도를 2013으로 기입하며, 잠깐 낯선 감각에 당황했습니다.

1월 1일 정초의 시작은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를 3D로 감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오리엔탈리즘의 논란에서 안전하게 비껴 선 영화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게이샤의 추억이 그러했듯이, 서구의 관점 안에서 빚어진 동양 코드의 작품은 종종 불편한 순간을 야기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인도 소년을 주인공으로 그 나라 특유의 감성을 운위하고 있음에도 굉장히 매끄럽고 능숙한 화법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헐리웃 자본의 고운 때깔은 유지하면서 말이죠. 동양인 관객인 제 수준에서, 적어도 라이프 오브 파이가 불편하게 느껴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아마 이안 감독이 중화권 출신이라는 점이 한 몫 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굉장한 영화입니다. 영상미를 두고 이야기하자면 피터 잭슨의 러블리 본즈 이상으로 아름다운 작품이에요. 관람을 계획하고 계시다면 필히 3D나 아이맥스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딱 한 줄이면 설명이 가능한 짤막하고 심플한 플롯의 이 영화가 두시간 남짓의 러닝타임 안에서 지루하게 늘어지지 않는 이유는, 영상 이펙트의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화려함이 단단히 한 몫 하고 있기 때문이죠. 눈이 호강한달까요.

영상 효과의 구현은 이 영화에서 단순한 볼거리 이상의 것을 제공합니다. 바다 한 가운데 홀로 남겨진 파이의 외로운 자아, 공포, 스트레스, 가족에 대한 미안함, 연인에 대한 그리움, 때로는 분열증세와 히스테리 등 그가 느꼈을 모든 내면 세계를 텍스트 이상으로 관객에게 잘 전달하는, 하나의 언어로 기능하고 있어요. 더불어 그의 성찰과 성장과도 맥락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의 피로와 고통이 극에 달한 순간, 거센 폭풍은 다시 한 번 그를 집어 삼킵니다. 회색 바람과 폭우 사이에서 신을 향해 외치며 해탈을 이룬듯한 파이의 모습은 관객에게 절절하고 서글프게 다가오죠.

영화에서 가장 관객을 압도하는 씬은 폭풍우에 버티지 못한 침몰선이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순간입니다. 숨 막히는 장관이에요. 수면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과 바다 속의 끔찍한 고요가 거대한 대비를 이루며, 천천히 평온한 심해의 품으로 침몰하는 수십 층 빌딩 크기의 화물선은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로 남습니다. 이 씬은 어떻게 보면 이 영화가 암시하는 바를 가장 함축적으로 제시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식하는 내면의 고요와 외부의 광끼, 치유와 통증, 종교와 이성, 안전과 위협, 삶을 위한 격렬함과 죽음이 선사하는 안식, 파이와 리차드 파커, 그리고 파이와 파이. 라이프 오브 파이 안에서는 많은 것들이 대비를 이루고 구도를 갖추어 함의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파이가 오로지 대화만으로 또 다른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새롭게 환기시키며 신선한 감각을 부여하는 씬입니다. 파이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가 떠오르더군요. 어느 쪽으로 믿든 그것은 우리의 선택, 당신의 자유입니다. 현실에 발을 딛은 잔혹 동화라고나 할까요. 라이프 오브 파이는 굉장히 심도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묵직하고 진한 무엇이 잔잔하게 우리의 가슴을 두드립니다.

결과적으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안 감독이 이루어 낸 또 하나의 성공입니다.




덧글

  • 남선북마 2013/01/04 12:29 # 답글

    라이프 오브 파이는 단 한민족에 국한되지 않은 인류모두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있기에. 오리엔탈리즘 논란에서 벗어난것 같습니다..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어서 오래도록 생각케하는 영화였네요.
  • 미스터칠리 2013/01/04 23:23 #

    관람하고 집에 와서 누운 후에도 한참이나 생각하게 만든,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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