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퍼, 2012 by 미스터칠리


막학기 말이라 바빠서 리뷰 업데이트를 못했습니다. 몇몇 영화는 벌써 상영을 내리기도 했군요. 밀렸던 리뷰, 지금부터 쉴 새 없이 시작합니다.

루퍼는 아이디어가 좀 더 업그레이드 된 터미네이터같습니다. 물론 터미네이터만큼 화려한 블록버스터는 아니죠. 대신 재치있는 발상이 반짝이는 영화입니다.

루퍼는 가까운 미래와 그보다 좀 더 먼 미래를 함께 제시하고 있습니다. 골자는 대충 이렇습니다. 먼 미래의 범죄 조직들이 적을 처리하는 방식이란 타임머신을 이용, 과거로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까운 미래에 새롭게 등장한 직업군이 미래에서 온 이들을 총으로 갈기고, 깔끔하게 처리까지 해준 후 은괴를 받죠. '루퍼'라고 불리우는 이 낯선 개념의 킬러들은 한 가지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의 조직들이 루퍼와의 관계를 은닉하기 위해, 고용한 루퍼 당사자들을 과거로 보내버리게 되는 상황입니다. 한 마디로 루퍼들은 미래의 본인을 본인이 죽여야 할 지도 모르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죠. 미래에서 날아온 자신을 죽이고, 처리까지 한 루퍼들은 그 답례로 금괴를 받습니다. 일종의 목숨값, 자신이 언제 죽을 지 알게 된 이들은 나머지 생을 흥청망청 즐기는거죠. 그리고 주인공 조셉 고든 래빗은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잠깐 당황한 사이 미래의 자신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현재의 나'가 '미래의 나'를 쫓는 다소 기이한 추격전이 시작되죠.

틀이 그렇게 견고한 영화는 아니지만 관객을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일단 메인 플롯 자체가 마치 헐리우드 버젼의 '기묘한 이야기'처럼 흥미로운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지루할 틈이 없이 계속 새로운 서브 플롯들이 튀어 나와 주거든요. 꾸준하게 등장하는 구성들은 초반에 미리 암시를 해두었던 것들이라 그렇게 난 데 없지 않고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습니다. 물론 살짝 미묘하게 영화 분위기가 달라지는 순간들이 있긴 합니다. 쭉 훑어 내려가다보면 SF의 틀 안에서 부분적으로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이 연상되기도 하죠. 

설정이 가진 아이러니때문에 영화는 흥미진진한 편입니다. '미래의 나'를 죽이기 위해 '용 쓰는 나'라,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조직과 루퍼와 미래의 루퍼, 이 셋의 관계는 재밌는 추격전을 낳으며 탄력적인 텐션을 제시합니다.

브루스 윌리스와 조셉 고든 레빗, 에밀리 블런트가 나옵니다. 다들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고, 특히 에밀리 블런트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이후부터 쭉 지켜봤는데 그녀는 자신이 가진 이미지보다 훨씬 다양한 캐릭터를 능청스럽게 소화하는 여배우가 틀림 없습니다. 새침한 잡지사 비서와 17세기 영국 대저택의 안주인, 그리고 남부 사투리를 구사하며 사탕 수수밭을 일구는 거친 여성까지. 

그런데 이 영화는 이야기에 구조적인 결함이 거대하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더 웃긴 건, 그 결함을 영화를 만든 당사자들 역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죠. 그들은 영화가 가진 논리적 모순을 대놓고 뭉개며, 몇 마디의 대사로 떼워버립니다. 시간 여행이나 타임머신을 다루는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매치하지 않는 당신들의 창조물을 '어쩔 수 없어. 시간이란 게 정말 복잡미묘한 것이거든'이라고 설명하며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죠.

뭐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렵니다. SF 영화라는 게 구구절절 따지고 들어가자면 아이디어를 마음껏 발휘할 수 없는 장르기도 하니까요. 설정에 대한 경계심만 버린다면 꽤 즐길만한 영화입니다.

덧글

  • 잠본이 2012/12/16 20:03 # 답글

    애초에 그냥 과거의 루퍼를 저승으로 보내버리면 도망친 미래의 루퍼도 샥 사라질텐데 그걸 뭐하러 귀찮게 신체훼손을 하나 싶기도 하더군요. 공포분위기 조성하려는 걸로밖에 안 보여서 OTL
  • 미스터칠리 2012/12/21 19:31 #

    ㅋㅋㅋ 맞는 얘깁니다. 행위에 좀 더 당위성을 부여해야 하는 씬들이 종종 엿보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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