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 Life by 미스터칠리

아버지 입원 12일 차. 

처음에는 모든 것이 혼란과 혼돈의 미궁 그 자체였던 아산병원이, 이제는 얼추 지리적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다. 몇 층에는 무엇이 있는지, 동관 서관 신관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다용도실과 화장실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대형 병원의 시스템은 뭐가 달라도 달라. 이 엘리베이터는 환자와 보호자, 직원만이 이용이 가능하며 미리 지급받은 바코드로 스캔을 해야 버튼을 누를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방문객들이 가끔 초조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기약없이 기다리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이용방법을 안내해준 것이 벌써 네 번째다.

나는 이 사진을 찍고 난 후, 한 쪽 다리가 절단되고 텅 빈 눈동자를 한 20대 후반으로 추청되는 청년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삶의 가장 절망스러운 부분들은 모두 종합병원에 집합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빠가 답답하다고 해서 1층 로비의 갤러리에 그림 구경을 나왔다. 김용일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아빠는 이 작가의 그림들이 너무 좋다고 했다. 한참을 들여다 본다. 돌담 아래 텃밭, 평상 위에 말린 고추, 어머니의 몸빼바지, 그 시절 복고 감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쇠창살...우리네 지난 날의 풍경들이 세밀하게 묘사되어있어, 유년시절의 기억같은 것들을 길어올리는 모양이다.



결혼식 축하 문구가 써진 수건부터, 지붕 밑의 물밭이 통 그리고 중간 중간 녹슨 부분까지. 아빠는 마치 그림 속의 집이 어릴 때 살던 집인냥 하나하나 손가락질하여 설명한다. '그때는 집들이 다들 이렇게 생겼지. 풍경이나 세간살이도 꼭 같어.'

왜 진작에 아버지와 같이 갤러리에 한 번 가볼 생각은 못했을까? 도시의 문화인 흉내를 낸답시고 그렇게도 뻔질나게 그럼전이니, 사진전이니, 비엔날레니 드나들었으면서도, 아빠가 이렇게 그림 구경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면 그는 예술적 기질이 꽤 충만한 사내였다. 기타를 잘쳤고, 노래도 잘했고, 가끔은 시 비슷한 글들을 어딘가에 끄적거리기도 했다.




로비에는 아산재단의 기부자 명단이 이렇게 벽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 전지현, 이영애, 최수종과 같은 연예인 이름들이 꽤 보인다.


아산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호다. 아산병원은 현대그룹이 설립한 아산사회복지재단이 의료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것이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의 현 이사장은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로, 그는 정주영 회장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 큼직한 모니터로 이렇듯 현대그룹과 정주영 회장의 일생을 소개하는 영상이 나오고 있다. 성공한 기업가의 가치로운 뜻이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 의료기술의 발전과 연구에 현대가가 쏟아부은 돈이 얼마나 어마어마할 것인가. 아버지가 2년 간 치료를 받았던 지방대학병원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아산병원에서는 잡아내었다. 이 병원은 가족의 은인이다. 나는 한때 서울과 지방 간의 의료기술 차이가 과연 있겠느냐, 근거없는 신앙이라 치부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그 믿음이 산산조각났다.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다만 대학 캠퍼스에 버금가는 이 거대한 병원에서 유일하게 자리잡은 1층 로비의 카페는...할말하않. 양 대비 가격이 창렬하고, 불친절하고, 놀라울만큼 맛 없는 커피를 내준다. 내가 이렇게 맛이 없는 커피를 맛 본 것은 2018년 광화문 트윈트리타워의 직장동료 결혼식에서 내어준 공짜커피 이후로 처음이었다.

잠실나루역에서 아산병원까지는 무료로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10분 간격으로 차가 오며, 평일 오후 5시 30분까지 운행한다. 주말에는 운행하지 않는다. 최근에 서울책보고라는 거대한 헌책방이 오픈했다. 

나는 잠실에 올 때마다 성냥갑같은 아파트 단지들이 불쾌하게 느껴지는데, 저 소형의 낡은 복도식 아파트가 한 채에 13억을 호가한다는 것부터 한강 옆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동네 미관이 후지기 때문이다(저 포도는 분명 시고 맛이 없을거야!). 

이 거대 종합병원에서 나는 삶의 가장 시고 떫은 맛을 엿본 기분이다. 최근 아버지 옆 병상에 한 젊은이가 새로 들어왔다. 췌장암이란다. 그의 아내는 하루종일 병실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건너 병상의 아저씨는 담도암으로, 의사로부터 3년이라는 시한부를 선고받았다. 대각선에 있는 이는 췌장에 혈관종이 발견되었고, 크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주사로 에탄올을 투여하는 것뿐이라는데 그 고통은 감히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한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얼굴이 질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병원의 가장 무서운 점은, 간병인들도 함께 생기를 잃어간다는 것이다. 불편한 침대와 변변치 못한 식사와 값비싼 치료비로 그들은 나날히 수척해지며 쇠락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 병원비 160만원을 추가 결제했다. 돈이 많이 든다. 올해 초 일을 조금 쉴까 고민했었는데, 별 수 없다. 회사에 더 다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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