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없는 일상 by 미스터칠리

어쩌다 업무지원을 나가게 된 창업주 기념행사.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내가 대체 왜 여기에...

돈을 심각하게 많이 벌면,
이렇게 죽고 나서도 세간의 칭송을 받으며 두고두고 기려질 수 있다.



미세먼지 가득한 한국프레스센터 꼭대기층의 뷰.
정면에 시청광장과 더플라자 호텔이 보인다.

행사 내내 구석에서 피피티 슬라이드를 넘겨야하는데, 
그저 엔터를 치면 되는 이 사소한 노동 안에는 실로 엄청난 리스크가 내재해있다.
특히나 그룹의 개국공신들이 모이는 이런 자리에서는 작은 실수도 치명적이다.
잠깐의 딴생각으로 사회자의 진행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오류가 뜬다?
상상만 해도 소오름..

윈도우 자동 업데이트 중단, 불필요한 시스템 소리 음소거, 
소머즈급의 오감으로 사회자의 진행에 발맞춘 재빠른 슬라이드 전환...
이따위 잡무에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말단의 처지란...

행사 시작 전 리허설을 하는데, 머리 위에서 불호령이 떨어진다.

- 이거 피피티 누가 만들었나?

K전무다.
신임이사로 소개하는 슬라이드의 프로필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만들긴 했지만 자료는 경영지원팀에서 준 것을 그대로 받아쓴 것인데...
모른 척 쌩까고 화장실로 도망칠까 잠깐 갈등했지만  

- 아, 제가 만들었습니다.
- 프로필이 아쉬운데? 이 내용이 맨 위에 있으면 안되지. 순서 몇 개 바꾸자.
- 넵!
- 자 이건 아래로..이걸 위로 올리고...
- 넵!!!!!!!!!!!!!!!!!!!!!!!

네...는 안된다. 네에~도 안된다.
넵! 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K전무와는 식사를 두어 번 한 일이 있는데 소속이나 이름을 기억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워낙에 높으신 분이고 발에 채이는 것이 아랫 것들이기에 으레 일 하러 온 똘마니겠니 할 뿐, 
누군지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낯 모르는 이를 이렇게 익숙하게 부리는 건 대체 어떤 훈련을 거쳐야 가능한 것일까?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프로필을 수정하고, 
그의 흡족한 미소를 확인 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란 노예.

행사는 그럭저럭 잘 마무리되었다.


고대했던 밥 시간.
캐비어를 곁들인 황새치.


그릴에 구운 안심, 흑마늘 소스, 더운야채와 왕새우.

공짜밥 먹고 기분 좋아짐 ㅎ
행사 끝나고 식장 정리할 때 남은 빵이랑 버터도 챙겨왔다.
어차피 버릴 음식...

콜드 폼 콜드브루로 마무으리.
과장없이 매년 4월부터 8월까지 이것만 한 50잔 마시는 듯.


지난 달 DDP에서 열렸던 플레이 스테이션 페스타.
사람 ㄷㄷㄷ 실화냐...
남자 9.9 여자 0.1 정도의 참여자 성비...
행사장에서 아재들 쉰내 오지게 남 ㅠ 물론 나도 거기에 일조 데헷


스태프들 등에 다 저런 붙이고 다님.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스킨십 하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
여기는 플스 구입 줄.


시연 타이틀 수가 엄청나게 많았는데 줄이 거의 무슨 에버랜드 놀이기구급.
엄두가 안나서 남들 플레이하는 것만 구경함.


덕후들 모이는 자리답게 코스튬플레이가 빠질 수 없지.


팔콤 38주년 생일을 맞이해 주최측에서 콘도 토시히로 팔콤사 대표에게 생일 케이크도 전달 함.
훈훈...



간병 Life by 미스터칠리

아버지 입원 12일 차. 

처음에는 모든 것이 혼란과 혼돈의 미궁 그 자체였던 아산병원이, 이제는 얼추 지리적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다. 몇 층에는 무엇이 있는지, 동관 서관 신관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다용도실과 화장실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대형 병원의 시스템은 뭐가 달라도 달라. 이 엘리베이터는 환자와 보호자, 직원만이 이용이 가능하며 미리 지급받은 바코드로 스캔을 해야 버튼을 누를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방문객들이 가끔 초조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기약없이 기다리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이용방법을 안내해준 것이 벌써 네 번째다.

나는 이 사진을 찍고 난 후, 한 쪽 다리가 절단되고 텅 빈 눈동자를 한 20대 후반으로 추청되는 청년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삶의 가장 절망스러운 부분들은 모두 종합병원에 집합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빠가 답답하다고 해서 1층 로비의 갤러리에 그림 구경을 나왔다. 김용일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아빠는 이 작가의 그림들이 너무 좋다고 했다. 한참을 들여다 본다. 돌담 아래 텃밭, 평상 위에 말린 고추, 어머니의 몸빼바지, 그 시절 복고 감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쇠창살...우리네 지난 날의 풍경들이 세밀하게 묘사되어있어, 유년시절의 기억같은 것들을 길어올리는 모양이다.



결혼식 축하 문구가 써진 수건부터, 지붕 밑의 물밭이 통 그리고 중간 중간 녹슨 부분까지. 아빠는 마치 그림 속의 집이 어릴 때 살던 집인냥 하나하나 손가락질하여 설명한다. '그때는 집들이 다들 이렇게 생겼지. 풍경이나 세간살이도 꼭 같어.'

왜 진작에 아버지와 같이 갤러리에 한 번 가볼 생각은 못했을까? 도시의 문화인 흉내를 낸답시고 그렇게도 뻔질나게 그럼전이니, 사진전이니, 비엔날레니 드나들었으면서도, 아빠가 이렇게 그림 구경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면 그는 예술적 기질이 꽤 충만한 사내였다. 기타를 잘쳤고, 노래도 잘했고, 가끔은 시 비슷한 글들을 어딘가에 끄적거리기도 했다.




로비에는 아산재단의 기부자 명단이 이렇게 벽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 전지현, 이영애, 최수종과 같은 연예인 이름들이 꽤 보인다.


아산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호다. 아산병원은 현대그룹이 설립한 아산사회복지재단이 의료사업의 일환으로 세운 것이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의 현 이사장은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로, 그는 정주영 회장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 큼직한 모니터로 이렇듯 현대그룹과 정주영 회장의 일생을 소개하는 영상이 나오고 있다. 성공한 기업가의 가치로운 뜻이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 의료기술의 발전과 연구에 현대가가 쏟아부은 돈이 얼마나 어마어마할 것인가. 아버지가 2년 간 치료를 받았던 지방대학병원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아산병원에서는 잡아내었다. 이 병원은 가족의 은인이다. 나는 한때 서울과 지방 간의 의료기술 차이가 과연 있겠느냐, 근거없는 신앙이라 치부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그 믿음이 산산조각났다.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다만 대학 캠퍼스에 버금가는 이 거대한 병원에서 유일하게 자리잡은 1층 로비의 카페는...할말하않. 양 대비 가격이 창렬하고, 불친절하고, 놀라울만큼 맛 없는 커피를 내준다. 내가 이렇게 맛이 없는 커피를 맛 본 것은 2018년 광화문 트윈트리타워의 직장동료 결혼식에서 내어준 공짜커피 이후로 처음이었다.

잠실나루역에서 아산병원까지는 무료로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10분 간격으로 차가 오며, 평일 오후 5시 30분까지 운행한다. 주말에는 운행하지 않는다. 최근에 서울책보고라는 거대한 헌책방이 오픈했다. 

나는 잠실에 올 때마다 성냥갑같은 아파트 단지들이 불쾌하게 느껴지는데, 저 소형의 낡은 복도식 아파트가 한 채에 13억을 호가한다는 것부터 한강 옆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동네 미관이 후지기 때문이다(저 포도는 분명 시고 맛이 없을거야!). 

이 거대 종합병원에서 나는 삶의 가장 시고 떫은 맛을 엿본 기분이다. 최근 아버지 옆 병상에 한 젊은이가 새로 들어왔다. 췌장암이란다. 그의 아내는 하루종일 병실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건너 병상의 아저씨는 담도암으로, 의사로부터 3년이라는 시한부를 선고받았다. 대각선에 있는 이는 췌장에 혈관종이 발견되었고, 크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주사로 에탄올을 투여하는 것뿐이라는데 그 고통은 감히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한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얼굴이 질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병원의 가장 무서운 점은, 간병인들도 함께 생기를 잃어간다는 것이다. 불편한 침대와 변변치 못한 식사와 값비싼 치료비로 그들은 나날히 수척해지며 쇠락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 병원비 160만원을 추가 결제했다. 돈이 많이 든다. 올해 초 일을 조금 쉴까 고민했었는데, 별 수 없다. 회사에 더 다녀야 한다.




리틀이디와 빅이디, 그레이 가든에서 by 미스터칠리


위대한 개츠비의 여성 버전이었던 그녀들의 삶.
사람들은 이 모녀를 두고 쇠락, 실패, 무지, 방탕이라는 키워드를 주워섬기지만,
그녀들은 그 보편성이 지배하는 이 사회의 그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행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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